분자 가족의 탄생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혼자의 삶이 고단해질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지 않고도 가족을 이룰 방법은 없을까? 제도를 벗어나 새 ‘가정’에서 이룩한 즐거운 동거 생활기. ::분자, 가족, 혼자, 함께, 제도, 동거, 생활기,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 분자,가족,혼자,함께,제도

“혼자 사는 게 잘 맞는다”라는 말은 10년쯤 그 생활을 지속해본 후에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처음엔 혼자 사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가끔 친구와 함께 산 적도 있었지만 넓지 않은 공간을 나눠 쓰는 건 어지간히 성격과 생활 습관이 잘 맞지 않는 이상 서로 받는 스트레스가 컸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서 발 매트 하나부터 빨래를 널고 책을 꽂는 방식까지 내 맘대로 하는 게 나의 성격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십수 년을 넘어가자 또 다른 스트레스가 쌓여갔던 모양이다. 언젠가 부산의 부모님 댁에 가서 자던 날 아침이었다. 일찍부터 부모님이 당신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뭔가를 보글보글 끓이고 달그락달그락 그릇 놓는 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잠에서 깼다. 갓 한 밥과 찌개 냄새가 났다. 그 소리와 냄새 속에 누워 있자니 한없이 따뜻한 느낌이 들었는데, 어째선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것이 그리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은 곧 내가 혼자 몸을 일으키는 고요한 아침의 온도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이후로 나는 혼자 살기 위해 내가 들여야 하는 에너지를 의식하게 됐다. 특히 밤이면 잡생각과 일종의 불안감 같은 것에 나도 모르게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었다. 그 고단함이 혼자 사는 삶의 가뿐함과 즐거움을 넘어서게 된 시점이 그 즈음 아니었을까 싶다.  결혼은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단지 혼자의 고단함을 피하자고 결혼 제도와 시월드와 가부장제 속으로 뛰어드는 건 고단함의 토네이도로 돌진하는 바보짓이었다. 나를 충분히 바보로 만들 만큼 매력적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것도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같이 사는 건 어떨지 떠보기도 하고, 셰어 하우스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나와 사정이 비슷한 친구를 만나 같이 살게 됐다. 같은 부산 출신에, 오랫동안 혼자 살았고, 이젠 혼자가 아니면서 결혼도 아닌 삶의 방식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나처럼 고양이가 두 마리 있었다. 우리는 은행의 도움을 얻어 넓은 집을 샀다. 둘이 따로 집을 구할 때보다 훨씬 유리했다. 각자 구할 수 있는 열몇 평 집에 주방과 화장실, 현관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는 것보다, 그것들을 갖춘 30평 집을 둘이서 나눠 쓰니 넓고 쾌적해서 좋았다. 고양이 넷도 전에 없이 넓은 공간을 뛰어다니게 됐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 집엔 욕조가 있다. 혼자 살기 좋은 조그만 집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지만 단 한 가지만은 참 아쉬웠다. 욕조가 없다는 것. 이제 동거인과 같이 산 지 거의 일 년이 돼간다. 만족도는 최상급이다. 동거인은 각종 요리와 어지르기, 빨래 돌리기를 맡고 나는 설거지와 청소 정리, 빨래 개기를 맡아 집안일의 배분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한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누그러진다. 서로의 인기척에 자연스레 잠이 깨고 집에서 매일같이 인사(잘 잤어? 어서 와. 다녀올게!)가 오간다는 게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혼자 살 땐 ‘정서적 체온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데 비해, 둘이 사니까 그게 자연스레 이뤄진다는 점이 좋다. 물론 육체적 체온 유지를 위해 욕조에 몸을 담글 수도 있다. 게다가 최고로 좋은 점은, 우린 여전히 ‘싱글’이라는 사실이다. 명절이면 각자 부모님께 다녀오거나 안부를 전한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함께 산다는 점에 매우 흡족해하신다. 훨씬 든든하다나. 요리를 잘하시는 동거인의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챙겨 보내주신다. 나는 찾아뵙거나 효도 여행 계획을 짤 필요 없이 “맛있다!”라고만 하면 된다. 싱글 생활의 가뿐함과 동거의 유리함이 함께한다. 물론 우리는 여러 가지가 잘 맞는 운 좋은 케이스다. 혼자 살기 아니면 결혼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우리의 즐거운 동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얼마나 아까운가!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율이 27%를 넘는다고 한다. 1인 가구는 원자와 같다. 물론 혼자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러다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다른 원자와 결합해 분자가 될 수도 있다. 원자가 둘 결합한 분자도 있을 테고 셋, 넷 또는 열둘이 결합한 분자도 생길 수 있다. 단단한 결합도 느슨한 결합도 있을 것이다. 여자와 남자라는 원자 둘의 단단한 결합만이 가족의 기본이던 시대는 가고 있다. 앞으로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분자 가족’이 태어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가족의 분자식은 F2C4쯤 되려나. 여자 둘 고양이 넷. 지금의 분자 구조는 매우 안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