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치밀해. 자기한테 득이 안 되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 돈을 쓰지 않거든.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널 만나는 줄 알아? 잘 생각해봐.” 어느 날 갑자기 그 해맑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나의 오랜 남사친이 정색하며 했던 말. 팔뚝의 솜털이 쭈뼛 곤두선 이 선언 이후 난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확신이 단번에 깨졌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남자 짝꿍과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고, 20년 지기 ‘파이어 볼 친구’들과 잠자리와 애무와 샤워를 제외한 모든 행위(?)를 다 해도 별일 없이 우정을 지켜온 나로선 이 반전의 파장은 꽤 컸다. 아직도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고리타분한 질문이 ‘논쟁’의 소재가 되는 걸까?
<요즘 남자 요즘 연애>의 저자이자 연애 칼럼니스트 김정훈은 이 의문에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즉답한다. 단, ‘친구라고 믿는, 혹은 믿고 싶은 사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친구’라는 형태로 굳어진 사이라면, 굳이 두 사람이 그 틀을 깰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둘은 서로를 친구라고 칭하겠죠. 그러나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완전한 친구가 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김정훈의 의견은 이렇다. 남자든 여자든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에게 물리적인 시간을 할애하는 것 외에도 ‘정신적인 노동’을 수반해야 한다. 동성애자가 아닌 이상 이성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면서 우정이라는 관계를 지키려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에 비해 ‘여사친’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을 겁니다. 여성이 생각하는 ‘남사친’의 개념과 남성이 생각하는 ‘여사친’의 개념 사이엔 간극이 있어요. 남사친을 오직 ‘친구’로만 대하는 여자는 많겠지만, 남자는 그에 비해 적다는 얘기죠. 실제로 남자들은 ‘그녀와 친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여자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남사친이 당신에게 동성 친구를 대하듯 센 말, 욕설을 하며 막 대한 적 있나요?”
<아무도 울지 않는 연애는 없다>의 저자이자 연애 칼럼니스트 박진진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다 또는 불가능하다 같은 설전은 의미가 없는 논쟁이에요. 남녀 사이엔 이미 무수한 친구 관계가 존재하니까요. 내 경우에도 함께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남자 친구들이 있어요. 그들이 나를 이성으로 보지 않고, 나 역시 이성으로 느끼지 않기에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는 관계가 가능한 것 아닐까요?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칭할 때 나이나 성별 같은 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물론 앞으로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100% 장담할 수 없겠지만.” 두 칼럼니스트의 동상이몽처럼, ‘남사친’의 개념에 대한 여자의 정의와 ‘여사친’의 개념에 대한 남자의 정의엔 다소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남자에게 여사친이 ‘현재는 친구, 나중엔 잘될 수도 있는 존재’라면, 대부분의 여자에게 남사친이란 ‘남친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친구가 된 존재’에 가깝다는 뜻이다. 내 남사친은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김정훈 칼럼니스트의 귀띔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해보자.
“남자는 대체로 잠재적 이성 친구로 느끼지 않는 여자에게 시간과 돈을 쓰지 않습니다. 물론 억지로 떠밀려 돈을 내는 경우를 제외하고요. 혹시 내 남사친이 내게 자주 연락을 하거나, 나의 잦은 연락에 성실하게 응하고, 밥이나 차, 선물을 종종 사주나요? 그렇다면 그는 당신을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의외로 많은 남자가 관심 있는 여자에게 장기 투자 전법을 구사하거든요. ‘인간’으로 먼저 다가가 가까워진 후 ‘남자’로 대시하는 거죠. 거의 100%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