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미래에 나를 던지는 법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어느 날 갑자기, 목적도 계획도 없이 뉴욕으로 떠났다. 영화 속 뉴요커의 삶이 펼쳐질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충동적으로 떠난 자가 마주해야 했던 처절한 고통과 달콤한 열매를 고백한다. | 라이프,미래,뉴요커,김나래,코스모폴리탄

모든 것은 작은 충동에서 시작됐다. 나의 20대를 돌이켜보면 늘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고, 그 들뜸을 유지하기 위해 내면은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자극을 좇았지만 그럴수록 공허함을 느꼈다. 당시 유일한 탈출구는 매일 밤마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는 것이었다. 전 시즌을 다섯 번쯤 돌려봤을 무렵, 나는 뉴욕으로 떠나겠다는 충동적인 결심을 했다. 특별한 목적이나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그대로 뉴욕으로 향했다.꿈꿨던 도시에서의 생활은 예상과 달리 절망적이었다. 언어 장벽, 사고방식의 차이, 낯선 외국인들과의 학교생활, 뉴욕의 높은 물가를 감당하기 위한 아르바이트,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에 시달렸다.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이런 걱정보다 더 힘들었던 건 순간순간 닥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이었다. 학교에서 예고도 없이 규정을 바꾸는 바람에 비자가 취소돼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뻔한 일이나, 휴대폰 요금을 사기당해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지불했던 일, 빈대에 물려 끔찍한 피부병에 시달려야 했던 일 등, 뉴욕에서 겪은 고난에 대해서라면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어느 날엔 아침 일찍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천장이 내려앉은 광경을 목격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그대로 문을 닫아버린 뒤 몇 번이고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별해야 했다. 뉴욕에서 벌어진 일들은  완전히 내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처음 수개월은 깊은 우울감에 시달리며 밤새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더는 못 하겠어!”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한국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찾아보며 이제 그만 포기하겠노라 소리쳤지만, 나에게는 포기할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에 좌절했다. 가장 최악은, 매번 포기하고 도망치는 나 자신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나 자신을 두고두고 비난하며 후회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뉴욕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오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버텨내자 어느 순간 나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이 도시에서의 일상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나는 학교생활을 착실히 잘해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시간 나는 대로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작은 행복을 계속 찾아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위기의 순간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변화가 있다. 도통 기다릴 줄 모르던 급한 성격, 자주 격앙되고 흥분하는 감정 기복이 사라지고 침착하고 차분히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는 나에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 답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난생처음 온전히 나를 위해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뉴욕에서 보낸 나날은 내게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2년여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여전히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부류였다. 뚜렷한 직업도,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는 사회 초년생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경력이 없으면 어떤가? 뉴욕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롭게 쌓아가면 그만인 것을. 가끔 뉴욕에서 쓴 일기를 읽어볼 때면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마음이 울렁거린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내 소망은 나의 삶이 돼 있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불확실함 때문에 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면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길의 가장자리에 나만의 발자국을 남기면 된다고 말이다.  About 김나래 20대의 절반을 모델로 살았다. 어느 날 ‘진짜 나’를 찾고 싶어 뉴욕으로 떠났다. 좌충우돌 끝에 찾은 진짜 내 길, 그림을 그리며 활동 중이다. 그 이야기가 담긴 책 <내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