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체 시인의 에로스 단편소설 -노예 |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KOREA)

달뜬 소년처럼 욕망이 차오를 때, 그 욕망을 채워줄 이가 곁에 없을 때, 문학은 그 빈자리를 채운다. 읽고 싶은 욕구 충만한 가을, 소설가 백가흠, 황현진, 전아리와 시인 이이체가 그들 각자의 에로스를 담아 발칙한 단편소설을 보내왔다.::에로, 소설, 단편소설, 이이체, 러브,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 에로,소설,단편소설,이이체,러브

 노예는 노예의 앞에 놓여 있다. 계단이 있고, 노예는 계단에 앉아 있었고, 노예는 계단에 앉은 노예 앞에 서 있었다. 밤의 짙은 빛깔이 시간을 시험하느라 어둠이 흐렸다. 이따금 불어오는 더운 바람이 노예와 노예의 사이에서 빈 자리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적막이 가장 예민하게 타오르고는 식어가는 무렵이다. 노예가 노예에게 물었다.나 울어도 될까?노예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노예는 눈물에 담갔던 몸을 꺼내는 기분이 들었다. 노예는 돌계단의 몇 번째에 몸을 두고 있었고, 그 앞에 노예가 서서 함께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노예는 수그린 노예의 머리를 보며, 무게를 느꼈다. 정작 울고 싶은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였는데. 뒤늦은 대꾸에 노예는 고개를 들었다. 질문보다 대답이 더 뜨겁다. 노예에게 물었던 그 한마디가 노예로 하여금 도리어 의연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노예는 하의로 가린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예의 눈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을 때부터 그 기운은 이미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비릿하고 시큼하고 떨떠름한 온도가, 차갑지 않을 때부터 이미 차오르고 있었다. 노예는 다시 고개를 수그린다.나 울 수 있을까?노예의 질문이 바뀌어 있었다. 노예는 대답을 바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노예가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면서 곡선을 되짚고는 눈에서 멀어졌다. 울음이 계속되는 만큼 몸은 계속해서 얌전히 흔들거릴 수밖에 없었다. 빛을 가지고 있는 밤이 약간은 어두워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노예는 노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려 하는지 가만히 곁에 있었다. 노예의 울음을 버릴 수 있도록 노예는 노예의 곁을 지킨 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를 기다리다 보면 마음에 빈 자리들이 조금씩 생겨나리라는 것을 알았다.당신의 깊이에 나를 담고 싶어.눈물이 적당히 떨어졌을 때쯤, 노예가 노예에게 말했다. 노예의 입술은 핏기가 빠져 탁한 분홍색이고, 밤에도 살아남은 빛들을 받아 다소 선명하다. 시선에 들어올 만큼 보이는 빛이 열려 있어서, 입술만은 유독 반짝이는 듯하다. 노예와 노예 사이의 공기가 더 농밀해지고 있었다. 가슴에 남몰래 숨어들어오는 도둑들이었다. 노예는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본다. 하늘은 까만 바탕에 구름으로 더 까만 무늬들이 얼룩져 있다. 달은 그 무늬의 뒤편에 숨은 듯 보이지 않는다.왜 당신은 당신이 한 적도 없는 일들 때문에 고통스러울까.다시 흥건해진 눈동자를 떨며 노예가 물었다.법이 필요해? 법이 있어야 당신이 품고 있는 속내를 내가 매만질 수 있을 거야.노예가 답했다. 노예가 노예와 마주 앉으면서, 울음의 방향은 더 구체화됐다. 노예는 노예를 보며 충동을 느꼈다. 이 충동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므로,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러나 쿵쾅거리며 요동치는 그 박진감은 어느 둔기로 타격하는 것보다도 강하고 묵직했다. 노예는 노예의 선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몸의 선과 거기에 감추어진 선이 모두 조화롭게 불화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꿰뚫어보며, 노예는 모종의 야릇한 지배욕을 느꼈다.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보다 더 정확하게는,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주고 싶은 마음. 그러나 욕망 없이도 지배는 가능했고, 노예에게 노예는 지배를 선물할 수도 있었다. 이 권력이야말로 아름다운 운동인가. 둘 사이에 말은 없어졌지만, 둘의 혀는 모두 마음이 북받쳐 요동치고 싶어 한다. 노예는 자신의 충동에 시시비비를 따지기에 앞서 노예의 자청으로 자신이 노예를 욕망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노예는 노예를 계단에 일으켜 세운다. 노예의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 그런 손가락이 몇 가지나 뻗어 있는 손, 그 손이 노예에게 오더니 머리카락을 쓱 훑어주었다. 노예는 손으로 노예를 매만진다. 존재의 일부가 존재의 일부와 접촉한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밤은 더 많은 벌레가 들끓고 더 끈적끈적한 습기가 차오르고. 일순, 노예는 노예의 눈동자가 밤보다 더 검고 깊다고 생각한다. 착각한다. 노예가 그 눈동자에 고인 것이다. 빠진 것은 나일 뿐, 노예가 빠뜨린 것이 아니라고, 노예는 머리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생각한다. 이것 역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하는 것이다. 노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휘젓는 노예의 머리카락 사이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더위보다는 긴장감 때문에 더 농도 높은 그것들은, 노예의 손끝에 닿아 터지면서 동그란 제 체형을 잃는다. 노예는 불안정한 마음에, 적정한 욕망을 지키려고 침을 삼킨다. 노예의 옷자락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자 노예는 흠칫 놀란다. 노예가 노예에게 성큼 다가온 것처럼. 아닌 게 아니라, 노예가 눈을 비벼 시야를 바로잡고 보니 노예가 가까이에 와 있었다. 노예에게 노예는 어떤 향을 보냈던가. 노예가 입술을 질끈 물자, 노예는 연하게 미소 짓는다. 그럼에도 선연한 그 미소에 노예는 또 눈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수그린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어느 무풍지대보다도 무덥다. 이곳의 외로움은 서로 사냥하지 못하고 서로 뜨거운 총구를 겨눈 채, 서로의 둘레를 돌고 있다.문득 빛이 들어왔다. 구름 사이에 가려진 달이 가만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달은 노예의 육체를 두고 밤과 겨루려는 듯, 긴 실오라기 같은 빛줄기를 몇 가닥씩 내밀었다. 밤이 고요한 어둠으로 온전하게 환해지는 찰나. 노예는 노예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노예도 노예의 옷자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들은 교활하게 움직여댔고, 음액에 절여진 몸에서 찰싹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은 습윤한 기후로 더 진득해져 있었다. 치욕만 움켜쥘 수 있는 살덩이와 살덩이의 여백. 이 염문은 마음의 것일 수도 있다. 노예는 제 몸을 포획해가며 연신 노예를 안았다. 자신을 안을 줄 아는 타인을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