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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진

서현진 l LIFE BLOGGER
프리랜서 아나운서
자발적 실업자 (최근 회사를 관뒀다! 대책 없음! 어쩔 거냐?) 말 못해 안달 난 직업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듣는 게 더 좋다. 재미 있는 글 읽고 쓰는 것--하지만 짧아야 한다--도 좋다. 스토리가 있는 도시인의 삶, 토박이 로컬들의 동네 이야기, 소소하게 지지고 볶는 연인들의 사랑싸움처럼 특별할 건 없지만 일상이 주는 보석 같은 순간에 대한 글을 쓴다.

2014.09.26 Fri

쇼핑중독, 끊을 수 없는 유혹


vol.4


처음부터 중독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단순한 관심 수준에 지나지 않던 때로 돌아가 보면 시작은 미미했다. 한 달에 한 두 번 상점에 들러 기껏해야 소소하게 윈도우 쇼핑을 하는 정도였고 어린 소녀의 용돈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소비했다. 그마저도 돈이 없는 날에는 진열된 상품들을 이것 저것 들춰보다 맘에드는 걸 발견하면 그 앞에서 가능한 오래오래 공들여 감상하는 데서 행복을 느꼈다.


언제부터였던가. 그녀의 순진한 관심은 집착을 넘어 중독으로 변해버렸다. 고작해야 한 달에 한 두번에 그치던 간헐적 소비는 어느새 주 2-3회로 늘어났고,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한 후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신나게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온전한 경제적 독립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분이 우울해서,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남들이 갖고 있으니까 등등의 온갖 이유로 그녀는 쇼핑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정당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쇼핑중독’이라 한다. 세간의 수군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여의도 I 쇼핑몰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이번 주만 꼬박 네 번째다. 드넓은 쇼핑몰 안 수많은 상점들을 잰걸음으로 지나쳐 마침내 도착한 곳, 요즘 그녀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놀이터이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개미지옥, 바로 서점이다. 그녀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지금 어려운 고백의 글을 쓰고있는 바로 나다.


다른 욕심도 아니고 책 욕심을 내는 건 칭찬 받을 일이다. 반박하는 이가 있다면 백 번 양보해서 ‘적어도 욕먹을 일은 아니다’고 정정할 의향은 있다. 대입에서 차지하는 논술 비중 때문이라고 하면 삭막하지만 어쨌든 학교들은 어린 시절부터 책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며 영어 조기교육 못지 않게 책읽기 교육에 신경쓰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조카 세림이도 엄청난 다독가다. 주 너댓권에 달하는 책을 읽고나서 독서일기를 쓰는데 여름 휴가때도, 추석때도 ‘싱글생글’ 이라 부르는 독서일기장을 짐가방에 넣어 다니며 극성을 떤다 싶더니 이걸 빠지지 않고 잘 하면 학기말에 금메달을 상으로 받는다고 한다.(사실은 금박지에 싼 초콜릿이다.) 


어린 조카와 경쟁하자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이틀에 한 번 꼴로 오프라인 서점에 들르고, ‘새로 나온 책’ 코너의 신상을 너댓권씩 쓸어담고, 그것도 모자라 밥먹듯이 온/오프 중고 서점을 들락거리며 ‘필독서’ ‘시대의 책’ ‘꼭 소장해야 하는 고전’ 이라 불리는 중고 책들을 사모은다. 어제 밤에는 인터넷 서점에서 최근 나온 e-book 파일 몇 개를 구입했다. 요즘 스마트폰으로 보는 짤막짤막한 글 읽기에 익숙해진 터라 도통 종이책이 읽히지 않아 고민하던 중 떠오른 대안이다. 하루의 마무리 까지도 책과 함께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실현 될지는 좀 더 지켜봐겠지만 이렇게까지 책에대한 무한 애정을 보이는 나야말로 이시대의 지성인, 진정한 애서가라 칭찬받아 마땅할 것을 정작 내 지인들은 왜 나를 중독자 보듯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걸까. 단순히 책을 사는 데 많을 돈을 써서는 아닐 것이다. 퍼뜩 최근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 제대로 읽은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것 때문에?


혼자 살고 있는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소파 위에는 읽다 만 책들과 날짜 지난 신문들이 쌓여 엉덩이 한 짝 놓을 공간도 없다. 이마저도 선점하지 못한 책들은 식탁 위, 침대 머리맡, 요가 매트 위, 하다 못해 화장실 휴지 걸이 밑에 난 빈 공간까지 용캐도 비집고 들어가 제각기 힘겹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무 책이나 집어 펼쳐보면 접힌 자국, 책갈피, 색색깔의 형광펜으로 너저분하게 영역표시가 되어있지만 도무지 언제 읽기 시작해서 어디까지 읽었는 지 짐작이 불가능하다. 책을 자주 사지 못하던 시절에는 간혹 읽고싶던 책을 사면 첫 장에 구입 날짜와 당시의 기분, 혹은 그 날의 날씨 등을 적어두곤 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읽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뜻밖에 발견한 오래전 내 모습에 추억놀이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어느 샌가 별 감흥 없이 책을 마구 사들이고, 한 번에 여러 권씩 사모으다보니 이런 소소한 재미가 사라진 건 물론이고 내가 산 책인 지 아닌지도 헷갈려 샀던 책을 또 사는 경우도 생긴다. 제목이 맘에 들어서, 디자인이 예뻐서, 하다 못해 책 날개 사진 속 저자 외모가 내 스타일이어서 등의 이유로 마구 쇼핑한 책들은 결국 제대로 애정 한번 받지 못하고 이 부분 저부분 대충 소비되다 방 한구석으로 슬그머니 밀려나 버린다.


그러고보니 내 책쇼핑 중독은 다른 중독 증세들과도 꽤 닮았다. 중독 대상이 되는 물건에 대한 애정을 넘어 집착에 이르게 만드는 소유욕은 기본에 소위 ‘장비병’이라 불리는 몹쓸 지름의 늪에 단단히 발목잡혀있다. 늘 행동하기 전에 새 장비부터 주문하고 보는 캠핑족이나 등산 마니아처럼 나 역시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도서관이나 책 대여점 이용은 고려 대상에도 넣지 않은 채 무조건 지르고 본다. 작심 삼일 류의 의지박약이라는 점에서 내 책중독은 다이어트 중독과도 맞닿아 있다. 새해를 맞아 우선 비싼 연회비를 내고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PT까지 끊어야지만 다이어트글 시작할 수 있는 일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우선 읽지도 않은 수 십권의 책이 수 십권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어야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고 적시에 자기계발을 하는 똑 소리나는 현대인 이 될 준비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걱정하는 책쇼핑 중독의 명확한 이유도, 뚜렷한 개선책도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내 중독의 기저에는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에 대한 못미더움,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고 추측만 할 뿐. 사도 사도 모자라고, 정작 손 안에 들어와도 문장 한 줄, 등장 인물 하나에 조차 애정을 줄 여유가 없는 건, 바쁜 생활과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어영부영 하다가는 머지않아 낙오되 버릴 것만 같은 조바심 때문 일 것이다. 글을 쓰다보니 결국 다 읽히지 못하고 책장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앞으로 영원히 누군가의 손길도 받지 못할 수 백 권의 책들이 느낄 법 한 억울함과 서운함이야말로 직업 방송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요즘의 내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끈기를 갖고 조금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각기 나름의 매력과 가치가 있는 책들인데 아예 읽힐 기회조차 박탈당한다면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은가? 아직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쇼핑 중독에 걸린 내게, 사놓고 방치해둔 수 백 권의 내 책들에게 관심을 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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