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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Sat

이혜경 위원장이 전하는 일을 즐기는 방법

우리가 직장에서 ‘권태’를 느끼는 건 일을 일로만 받아들이고,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여성운동을 이끌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운영해온 이혜경 집행위원장은 놀이처럼 일에 몰입하고 즐기는 사람에게 권태는 없다고 말한다.


얼마 전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열렸었죠. 올해의 주제인 ‘각양각색 99%’는 어떤 의미인가요? 

1988년에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당시 구호가 ‘우리는 99%다’였어요. 신자유주의 안에서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힘들어요. 거대 시스템 안에서 식민화된 채 사니까요. 하버드 대학을 나왔든 지방대학을 나왔든, 연봉이 많든 적든 간에 언제나 경쟁하고 업적을 내야 하죠. 가족 내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아빠는 돈 버는 기계, 엄마는 자식들 수발 드는 기계, 애들은 공부하는 기계로 모두가 도구화된 거죠. 젊은이들은 사는 데 치여 연애도 못 하고요. 근데 요즘 영화들을 보면 이런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이 발견돼요. 최근 개봉한 영화 <그녀>만 봐도 주인공이 컴퓨터 운영체제와 연애를 하잖아요. 전 그 영화가 SF 장르인데도 진짜 리얼하게 느껴졌어요. 요즘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생활에 치여서 누군가를 만나고 상대에게 맞추는 걸 너무나 피곤해해요. 그러니 자신에게 최적화된 인격의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죠. ‘각양각색 99%’란 주제는 1%가 아닌 99%의 삶, 그 다양한 결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성찰해보자는 의미예요.


영화제는 끝났지만, 지방 순회 상영 ‘gogo시네마’, ‘10대를 위한 미디어교실’ 같은 여성영화제 활동은 계속되더군요. 

여성영화제의 ‘지역화’는 2회 때부터 추진하려고 했던 사업이에요. 여성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게 정말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보통 영화제 출품 작품은 영화제 기간에만 상영하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거라 쉽진 않았어요.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해 2010년 여성영화제의 미디어 교육실을 만들었어요. 초기엔 여력이 없어 영화를 빌려주기만 했는데, 이젠 직접 가서 행사를 주최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토론을 해요.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죠. 현재 여성영화제란 이름으로 열리는 행사가 전국에 32개예요. 아직은 불안정하지만, 사람들이 영화란 매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건 정말 좋은 변화 같아요. 


1980년대부터 여성운동을 하셨잖아요?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제까지, 문화 예술로 여성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사회운동이란 건 늘 옳은 걸 주장해요. 민주주의, 평등, 자유를 위한 외침이니까요. 근데 1980년대 초반의 여성운동 스타일은 굉장히 진보 엘리트 성향이 강했어요. 비대중적이었죠. 여성운동이 해야 할 일은 진짜 많아요. 성매매, 성폭력 같은 무거운 문제도 당연히 건드려야 하고요. 하지만 일상의 여성들이 숨쉬기 편한 좋은 공기를 만드는 건 문화 운동이 해야 할 몫이에요. 그래서 여성운동을 ‘여성적 방식’, 다시 말해 문화 예술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독일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여성단체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단체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가 매일 모임에 늦는 거예요. 평소 굉장히 성실한 친구였는데 매번 지각하는 게 이상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차비가 없어 매일 집에서부터 몇 시간씩 걸어온다는 거예요. 순간 정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신념도 좋고, 여성운동도 좋지만, 그걸 하는 사람이 하루 세끼는 먹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 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당시 저의 제일 큰 관심사는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한테 ‘돈을 주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대학로로 갔죠.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대중이 들어주는지, 팔아주는지 확인하려고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첫 작품으로 올렸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났어요. ‘여자여, 자기만의 방을 가져라!’는 메시지에 한국의 여성들이 엄청나게 반응한 거예요.


<자기만의 방> 이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아마조네스의 꿈>도 상연했잖아요. 그러다 199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시작했고요. 여성운동을 위한 문화 예술 장르를 연극에서 영화로 바꾸신 계기는 뭐였는지, 영화제를 처음 시작하셨을 때 포부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첫 연극에 이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까지 대박을 쳤는데, <아마조네스의 꿈>이 적자가 났거든요. 하하. 영화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영화가 연극보다 좀 더 대중적인 방식,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영화제 초창기엔 당시의 여성들한테 자기 긍정,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게 중요했어요. 그리고 회를 거듭하면서 매년 과제가 달라졌는데, 늘 변함없이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우리 시대의 문화를 계속 성실하게 일궈나가는 것이었어요. 운동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놀이와 몰입의 축제’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제가 처음 여성운동을 시작할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잘난 년들 모임이다’, ‘지식인 중심이다’였어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같이 나누고 싶은 영화들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영화제인데, 보다 보면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거는 작품도 있어요. 어눌하지만 속이 빛나는 사람, 시니컬하지만 따뜻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화도 어법이 다양하니까요. 우리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듯 다양한 개성을 인정하는 건 중요한 문제예요. 감각의 획일화는 안 되죠. 여성영화제를 본 사람들이 가장 놀라는 부분이 정말 다양한 영화가 있다는 거예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만 관객이 아니란 거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도 우리의 관객이 될 수 있어요. 전 20~30대가 ‘진정성’ 있는 다양한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우리의 미래니까요. 



지난 인터뷰들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놀이의 즐거움’을 찾아다녔단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세상은 놀이터고, 탐구 대상이었다고요. 요즘도 일할 때 놀이처럼  즐기시나요?

그럼요! 일할 때 놀이의 즐거움을 찾는 건 정말 큰 힘이 돼요. 누군가는 저를 ‘무쇠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전 일을 일처럼 하는 걸 끔찍하게 여길 뿐이에요. ‘논다’는 말의 의미는 시스템이나 권력 같은 타율성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에너지에 충실한 거예요. 그래서 놀 줄 안다는 건 정말 중요해요. 흑인들을 보면 굉장히 한이 많잖아요? 역사적으로 가난한 사람, 억압받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근데 한이 많은 사람들은 신기하게 흥도 많아요. 삶을 엄청 긍정하고 사랑하죠. 한 하면 빠지지 않는 우리나라에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노래가 내려오는 것처럼요. 하하. 


한동안 재정 문제로 영화제가 부침이 있었다고 알고 있어요. 여성운동에 대한 신념으로 진행해오신 일이지만, 그럴 땐 정말 많이 힘드셨을 거라 생각해요. 영화제를 시작한 이후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뭐였나요?

아시다시피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지 않잖아요.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과는 한 테이블에 같이 앉는 것도 싫어하고요. 그럴 땐 정말 난감해요. 예전엔 기자들이 와서 영화제를 운영하며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으면 “돈이오!”라고 했거든요? 근데 요즘엔 “사람이 힘들다”라고 솔직하게 말해요. 하하. 제가 한동안 건강이 많이 안 좋았던 때가 있는데, 생각해보니 다 스트레스 때문이더군요. 여성운동은 워낙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한 운동이에요.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네트워크도 없이 살아가고, 남자들처럼 제대로 평가받는 게 쉽지 않은 게 여자들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너무 가진 게 없으니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절대 욕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일했어요. 미련했던 거죠.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전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엄청나거든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였나요?

우리 영화제는 관객들의 영화제예요. 하지만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 제 원동력은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이에요. 토론하면서 싸울 때도 많지만, 각자 자신의 의견을 성실하게 얘기하고, 좀 까칠해도 치열하게 일을 해내는 것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첫 회 여성영화제를 함께 준비했던 분들과 지금까지 일한다고 들었어요. 저마다 다른 의견은 어떻게 조율하세요?

토론을 정말 많이 해요. 조직위원회에서도 가능한 한 ‘여성적인 방식’, ‘비권위적인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요. 그럼에도 사람들 생각이 저마다 다르다 보니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세대 간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고요. 세대 간의 경험이 다른 만큼 감각 또한 다르고, 같은 단어도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하다 보니 오해가 쌓일 때도 있죠. 이 사람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저 사람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언어를 더 엄격하게 사용하고, 저희만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고 해요. 제가 나이(62세)가 좀 많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린 후배들과 삶의 방식, 경험의 폭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전 그 친구들과 늘 ‘같이 간다’고 생각해요. 잘난 척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제가 가진 ‘결정적인 결정권’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세대마다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죠. 젊은 사람들한테 ‘헝그리 정신을 가져라’라고 하면 안 통해요. 제가 경험한 70~80년대는 돈보다 사회문제가 더 앞섰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야만 했고요. 근데, 경험이 달라서 소통이 쉽지 않다고 해도 말을 안 할 수는 없어요.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걸 얘기해야 하고, 서로를 이해해야 하니까요. 살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대면했을 때,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타협을 하는 과정은 굉장히 즐거운 일이에요.


30년 넘게 한길을 걸어오셨는데, 권태로웠던 때는 없었나요?

권태로운 건 없어요. 영화제를 예로 들면 자금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해 매년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전 매해가 새롭고, 늘 긴장돼요. 관객과 마주해야 되고, 시대와 직면해야 하니 지루할 틈이 없죠. 


사회 속에서 불안해하고, 피곤해하고, 힘들어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전 어렸을 땐 놀기 위해서 공부했어요. 아버지가 동화책을 많이 사주셨는데, 그걸 학교에 갖고 가서 애들이랑 같이 읽고, 연극으로도 만들었고요. 근데 연극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친구들이랑 떡볶이라도 사 먹으면서 준비해야 하니까요. 그럴 땐 종이인형을 만들어 친척들한테 팔았어요. 그래서 전 노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삶의 폭을 크게 만들어주니까요. 제 아이 역시 어렸을 때부터 자유롭게 놀고, 자기 식대로 삶의 공간을 넓힐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성인이 된 후에도 노력만 한다면 삶의 폭이 지금보다 더 넓어질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자신의 영역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거니까요. 스스로 행복한 경험을 넓혀가야 해요.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에 충실하게, 놀이와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고 사세요.



*자세한 내용은 코스모폴리탄 8월호 부록 [COSMO BUSINESS]에서 만나보세요!


CREDIT
    Editor 김현주, 김가혜
    Photographer 김한준
    Stylist 문승희
    Hair & Makeup (이혜경)김원숙, (김현주)이희헤어앤메이크업
    Assistant 이상미
    Location 메가박스 신촌
    Fashion Cooperation (이혜경)셔츠·팬츠 르베이지, (김현주)셔츠 르베이지

이 콘텐트는 COSMO BUSINESS
2014년 08월호

기사입니다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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