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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8 Fri

사랑이 집착으로 바뀔 때

그의 문자를, 이메일을, SNS를 뒤지게 만드는 그것, 집착.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지, 사랑의 변질 바이러스인지 모를 이 집착만큼 우리의 연애를 고달프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이달 코스모는 독자들이 덜 집착하고, 더 행복하게 연애할 수 있도록 집착에 관한 특집 기사를 준비했다. 연애담 공유 사이트 ‘감친연’과 17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 도발적인 작가 김얀의 ‘집착’ 하면 생각나는 그 남자 이야기와 우리 주변 그녀들의 집착에 얽힌 황망한 사연들, 전문가들이 말하는 집착을 끊는 방법까지!


그녀들이 집착한 사연 

지난 <별에서 온 그대>의 인기는 ‘신드롬’이란 표현도 무색할 정도다. ‘어마무시하게 잘나가는 여배우의 외계인 집착기’ 정도로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이 드라마에 푹 빠져 지내면서도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천송이가 전지현이 아니었다면?’ 아마 천송이는 지금처럼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았을 테고, 현실에선 ‘스토킹’ 죄목으로 경찰서에 몇 번은 잡혀갔을 거다. 그녀가 도민준에게 하는 일련의 행동은 ‘집착’의 전형적인 모습. 자신은 3개월 뒤에 저 살던 별로 돌아가야 하는 ‘외계인’이란 도민준의 믿지 못할 고백을 듣고 “그래서 날 좋아한 적이 없다는 거야?”란 질문만 반복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가 보고 싶어 그 높은 빌딩에서 옆집 베란다로 넘어가려는 그녀의 머릿속에 이성이란 게 과연 존재할까? 아침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치정’에 얽힌 갖가지 사건의 가해자는 늘 이런 말을 한다. ‘너무 사랑해서’, ‘홧김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섬뜩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이들과 천송이 사이엔 ‘사랑과 집착’이란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집착은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이면 같다. 또는 건강하지 못한 연애 관계의 증거?       


얼마 전, 아는 동생 A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스무 살 시절 첫사랑 이야기를 털어놨다. 당시 힘들어하는 모습에 실연의 상처가 정말 큰가 보다 생각했는데, A의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 못지않게 놀라웠다. 첫 번째로 놀란 사실은 평소 너무 솔직한 게 흠이라면 흠인 A가 그 남자에게 한 거짓말. “보고 있어도 보고 싶더니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고 있어도 의심이 되더라고요.” 그가 시야에서 잠시만 사라져도 못 견뎌하던 A는 하루라도 결혼을 앞당기기 위해 ‘이름 모를 불치병’에 걸린 양 행동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불안해하며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자나 깨나 그가 자신을 버리진 않을까 걱정하던 A는 황당하게도 먼저 바람을 피웠고, 그녀에게 지친 남자는 당연한 수순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두 번째로 놀란 사실은 그녀가 전 남친이 새로 만나게 된 과 선배를 불러내 “제발 헤어져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해에 둘 사이는 더욱 견고해졌고, 술로 연명하던 A는 어느 새벽, 그에게 발신 번호를 지운 다음 육두문자를 보냈다. “너 같은 새끼는 행복하면 안 돼”라고.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착한 문자를 보고 A는 심장이 터질 뻔했다고 한다.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은 너밖에 없겠군.” 첫사랑의 기억을 예쁘게 봉인하고 싶었던 A가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하기까지는 무려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런가 하면 아는 언니 B는 한동안 전 남친의 메신저를 훔쳐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글쎄, 어젠 그 계집애가 오빠한테 임신 가능성이 어쩌고 하지 뭐야? 사무실 컴퓨터로 그런 대화를 하고 있다니, 진짜 간도 크지 않냐?” 그런데 씁쓸한 현실은, 근무 시간에 메신저로 모텔, 섹스, 임신 등의 단어를 주고받는 두 남녀를 욕하던 그녀 역시 사무실에서 그 내용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B의 전 남친은 여자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바람기를 좀처럼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첫 섹스를 하고, 첫 오르가슴을 느낀 남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갑자기 안 좋아진 집안 사정 때문에 금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B는 툭 하면 어디서 이상한 균을 옮아와 산부인과에 가게 만드는 그와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어쨌거나 전 남친, 그리고 그와 사내 비밀 연애를 하는 요망한 계집애를 감시하는 데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쓰던 B의 고약한 취미 생활은 전 남친이 메신저의 비밀번호를 바꿔버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집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앞에서 집착하는 여자들의 사연을 들은 소감이 어떤가? 누군가 당신의 얘기를 들었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리던가? 아니면 내겐 이런 일이 없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나? 그것도 아니면 같은 여자로서 연민을 느꼈나? 그런데 과연 이런 집착이 비정상적인 것일까? 인류학자이자 <연애본능>의 저자인 헬렌 피셔는 상대에게 집착하는 건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감정이 깊어지는 동안 어떤 강박도 느끼지 않았다면 당신은 진짜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에요.” 호르몬 이름 따위엔 관심 없는 사람들도 ‘도파민’이 뭔진 대충 알 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 분비된다는, 황홀감, 갈망, 심지어 중독에도 관련돼 있다는 화학물질.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상대를 볼 때면 뇌 중간에 있는 ‘복측피개부’라는 부위의 활동이 급격하게 활발해지는데, 뇌의 ‘보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위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매우 의욕적으로 변한다. 헬렌 피셔와 그녀의 연구진은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불안과 관련된 부위인 ‘섬피질’이 환하게 빛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니 그가 연락하겠다 말하고선 문자가 없는 상황에서 불안과 초조를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왕년에 집착깨나 해본 에디터는 연애하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믿어왔다. 집착하는 사람과 덜 집착하는 사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상대에게 얼마나, 어떻게, 왜 집착을 하는 건지 말이다. 그리하여 연애담 공유 사이트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holicatyou.com)’와 함께 대대적인 설문 조사를 벌였고, 1700명의 응답자 중 무려 72%가 “남자 친구에게 집착한 적이 있다”라고 답한 결과를 보고 비로소 안심(?)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연인 사이에서 사생활에 대한 적당한 관심의 수위를 묻는 질문에 ‘서로의 일상을 파악하는 정도’라고 대답한 비율(72%)과 같다는 것. 서로의 사생활 깊숙이 관여하는 관계를 지향하진 않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증세가 바로 집착인 것이다. 영양사 방아름(가명, 26세)은 전 남자 친구에게 서프라이즈 파티 이벤트를 해주려다 괴물 취급을 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남자 친구는 부모님과 같이 사는 데다 집안 분위기가 워낙 엄해 집에 초대하기는커녕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제가 남자 친구가 타고 다니는 버스 번호와 전화 너머로 들리는 정류장 알림 방송을 기억해뒀다가 남자 친구의 집을 알아내서 기념일에 놀라게 해주려고 찾아갔더니 절 괴물 보듯 하더라고요. 엄청 싸웠죠.”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다른 커플은 어떻게 사랑하고 있을까?>의 공동 저자인 페퍼 슈워츠는 사랑이 집착으로 바뀌는 이유에 대해 “상대가 당신의 감정에 불을 붙이기엔 충분하지만, 그에게 확신을 가지기엔 모자란 관심과 격려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남자 친구에게 집착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그가 내게 너무 무심해서”라는 답변이 가장 많고(42%), “바람이 의심되는 행동 때문에”가 두 번째로 많은(32%) 설문 결과를 보니 역시 그런 것 같다. 한국상담심리학회의 강진구 교수는 상대방과 솔직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 부득이하게 비효과적이고 병리적인 집착 증상에 빠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질투가 관심의 왜곡된 표현 방식이라면 집착은 병리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해결하는 겁니다.” 


사랑이 광적으로 변할 때 

혹시 당신은 현재 남자 친구의 휴대전화, 이메일, SNS 비밀번호를 알고 있나? 설문 결과 응답자의42%가 그의 비밀번호를 안다고 답했는데, 그것으로 그의 사생활을 확인하는 빈도는 의외로 낮았다. 가끔 생각날 때 한 번씩(51%) 확인하거나, 알기만 알았지 써먹는 일이 거의 없다(35%)는 답변이 대다수였던 것. 비밀번호 앞에선 여유를 보였지만, 그의 주변에 신경 쓰이는 이성이 있냐는 질문에 대한 반응은 달랐다. 절반이 넘는 응답자(54%)가 “있다”라고 답했고, 이 중 “그 이성의 뒷조사를 하거나 연락을 한 적이 있다”라고 답한 사람이 41%나 된 것. “그와의 관계 진전을 위해 일부러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도 36%나 됐는데, 잠자리 후 관계의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거나, 없었거나 오히려 나빠졌다는 대답이 66%나 나온 걸 보면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닌 듯하다. 유치원 교사 김은지(가명, 27세)는 전 남자 친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임신했다는 거짓말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남자 친구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가끔 피임을 하지 않은 상태로 잠자리를 가졌어요. 그가 헤어질 기미를 보이자 임신한 것 같다고 말했고요. 임신한 척 꾸민 임신 테스터기 사진을 찍어 장문의 문자와 함께 보내고, 그의 어머니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협박에 가까운 말도 해봤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별 후의 집착은 어떤 모습일까? 연구소에서 조교로 근무하는 이아영(가명, 27세)은 이별 후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쳤다고 한다. “남자 친구가 좋아했던 피규어와 평소 갖고 싶다던 장난감을 집 앞에 몰래 가져다놨어요. 혹시 누가 가져갈까 싶어 집 근처에 숨어서 지켜본 적도 있는데, 그는 선물만 챙겨서 집에 들어가더라고요. 그러곤 연락 한 통 없었어요.” 사내 연애를 했던 은행 텔러 김유진(가명, 26세)은 쿨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 친구를 붙잡진 않았지만, 자신을 붙잡아주길 기대하며 한동안 그의 주변을 서성였다. “우연을 가장해 그의 눈에 띄려고 갖은 애를 썼죠. 점심 메뉴를 미리 알아내 식당에 가 있는다거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맞춰서 나갔어요. 뒤에선 SNS와 카카오톡 프로필을 염탐하며 끊임없이 그의 동태를 살폈고요.”


이번 설문에서 헤어진 후 그를 스토킹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45%. 그런데 이 중 무려 81%가 그의 개인적인 온라인 공간을 뒤진다고 답한 걸 보면 비밀번호 앞에서의 여유는 연애 때나 가능한 것 같다. “우리에게 인터넷이 감정 교류의 주된 장으로 자리를 잡았단 증거겠죠. 타인의 일상과 감정 상태에 대한 정보를 얻는 가장 손쉽고 은밀한 방법임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네요. 그러나 이 방법으론 절대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할 수 없어요”라고 강진구 교수는 말한다. 그러니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페이스북 담벼락에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구구절절하게 적어 올리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 대학 행정직원인 이연우(가명, 26세)는 한 달 가까이 자신의 카카오톡에 그리움 가득한 글을 적다 그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바로 포기했다고 말한다. “새로운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을 올렸더라고요.” 

출판사 홍보팀의 김지영(가명, 27세)은 예전 남자 친구에게 매달리던 때만큼 자신이 초라한 적은 없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한다. “제가 먼저 좋아해서 사귀게 됐거든요. 남자 친구는 워낙 표현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는데, 전 조금만 서운한 일이 생기면 과민 반응을 보였어요. 내가 싫어진 거냐, 뭐가 잘못된 거냐, 마음이 변한 거냐며 계속 추궁했죠. 그런 제 의심에 지쳐 결국 이별을 고하더라고요.”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이고은(가명, 27세)은 남자 친구의 카톡 알람이 신경 쓰여 휴대전화를 훔친 적이 있다고 한다. “남자 친구랑 있을 때 늘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여자가 있었어요.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옆에서 슬쩍슬쩍 훔쳐보기도 했는데, 그게 기분이 나빴는지 언제부턴가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안 꺼내더라고요. 바람을 피우는 것 같긴 한데, 증거는 없고…. 헤어지길 오늘내일 하고 있던 어느 날, 카페에 갔는데 남자 친구가 외투를 벗어놓고 화장실에 가더라고요. 이때다 싶어 휴대전화를 훔쳤죠.”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절도 행각(?)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둘은 결국 헤어졌다. 


‘감친연’의 운영자인 ‘홀리겠슈’는 이번 설문 결과에 대해 ‘집착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것’이라며 이렇게 당부한다. “보여주는 대로, 말하는 대로 믿을 수 없는 관계는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그만두는 게 좋아요.”  



집착적인 사랑의 4단계
운명적 이끌림이 이별로 산산조각 나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끌림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처음 눈길을 주는 순간부터 애정 혹은 애착을 느낀다. 상대에 대한 비현실적 환상을 품으며 영원히 함께할 거란 성급한 생각을 하거나 상대를 구원자 비슷한 존재로 여긴다. 상대의 비정상적 행동이나 중독 행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신호도 무시해버린다.

불안 관계의 전환점으로 대개 두 사람 사이에 정식 교제, 약혼, 결혼 등의 약속이 체결된 후 발생한다. 하지만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의 문자가 오지 않는 것에 매우 초조해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지? 그는 분명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집착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극도로 불안해한다. 집착 대상 외의 다른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태세. 그의 집 앞을 서성이고, 이메일을 해킹하고, 문자를 뒤지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스토킹하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 심리적·육체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파멸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이전의 세 단계를 거쳐 결국 관계가 망가지는 시기다. 공허함과 자책, 자기 혐오와 분노를 느끼고, 복수를 결심하(고 실행하)기도 한다. 대부분 심한 우울을 느끼며,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섹스나 술 등에 의존한다. 발작, 한기, 식욕 감퇴, 불면, 설사, 변비 같은 ‘금단 증상’을 보인다. 


Survey on Obsession

1. 집착하게 된 계기는?

42% 그가 내게 너무 무심해서

32% 바람이 의심되는 행동 때문에

16% 기타

10% 구속하는 연애 스타일이 좋아서


2. 당신의 집착이 연애에 끼친 영향은?

34% 이별의 원인이 됐다

28% 싸움의 원인이 되긴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26% 적당한 집착을 통해 관계가 더 끈끈해졌다

12% 기타


3. 상대방의 집착이 나에게 끼친 영향은?

37% 구속받는 것 같아 갑갑했다

19% 연애에서 갑이 된 것 같아 우쭐했다

17% 자주 다투다 결국 헤어졌다

16% 자주 다투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다

6% 나도 그에게 집착하게 됐다

5% 기타



한없이 불행에 가까운 집

<낯선 침대에 부는 바람>의 저자이자 칼럼니스트인 김얀이 ‘집착’ 하면 생각나는 그 남자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2008년 4월. 나는 한 남자를 피해 현해탄의 검은 파도 위에 숨어 있었다. 총 승선 인원 600명의 커다란 페리 안. 나는 무려 10시간 동안 배멀미를 참으며 좁은 침대칸에 모로 누워 있었다. 부산항의 흐린 하늘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비와 바람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화장실로 가는 통로에서 나는 몇 번이나 우스꽝스럽게 비틀거렸다. 그런데 앞으로 이만큼의 시간을 더 견뎌야 도착이라고 했으니 내 마음은 검은 파도 위를 떠도는 부표처럼 흔들렸다.


27살의 봄. 급하게 결정된 오사카행.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원서로 읽기 위한 어학연수는 대외적인 변명이었다. 내가 한국을 벗어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 때문이었다. 이제 와 말하지만, 나는 지난 2년간 그 남자의 집착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자를 만난 곳은 내가 일하던 바였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열정적인 투잡족이었다. 평일에는 치과 간호사, 주말에는 바텐더가 나의 직업이었다. 나는 젊었고,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무라카미 류 소설 속 ‘교코’처럼 쿠바로 가는 것,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교코처럼 트럭 운전과 춤으로 돈을 모으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당시 나는 그만큼 터프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치과와 칵테일 바 일도 나쁘진 않았다. 무엇보다 주말 바텐더 일은 젊은 남자 손님들 때문에 재미가 있었다. 


손님으로 온 남자는 술이 취해도 과묵했고 여자에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같이 온 동네 형이라는 사람과만 이야기를 하고 모든 바텐더들을 무시했는데,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스물여섯. 나는 한번 문 먹잇감은 절대 놓지 않는다는 82년 개띠 여자. 나는 남자의 맞은편에 서서 계속 눈빛을 보냈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내놓으라고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내가 마치는 시간까지 기다려달라고 떼를 썼다. 내가 흔드는 꼬리에 그는 기분이 풀린 듯했고 가게 앞 실내 포장마차에서 어묵탕을 먹으며 첫 데이트가 시작됐다. 밝은 데서 본 남자는 나이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그렇게 만난 지 100일쯤 지나서야 남자는 나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려고 말문을 여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마음이 열리자 말문이 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말을 많이 할수록 나는 그가 싫어졌다. 그의 말 대부분은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유명 대학의 장학생이라는 걸 늘 강조했다. 그러면서 학생증을 꺼내 보여주곤 했는데, 그렇게 알게 된 그의 진짜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스무 살이었다. 나에게 꼬박꼬박 오빠라는 호칭을 받아내던 그를 백번 이해하려고도 해봤지만, 유명 대학 학생증을 위조해 다니는 재수생은 그저 철없는 스무 살로 보일 뿐이었다. 누가 봐도 아버지의 것으로 보이는 차를 자신의 차라며 내 친구들에게 자랑할 때면 담배 냄새가 짙게 밴 그 차 시트에 코를 박고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이 알아주는 부자라는 말도 지겹게 했다. 그러다 자기가 한 거짓말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더 이상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이번엔 그보다 무서운 집착이 시작됐다. 


처음엔 내 휴대폰을 압수해 남자 이름의 번호를 다 삭제했고, 내 퇴근 시간에 1분도 늦지 않고 직장 앞으로 데리러 왔다. 행여나 주말에 가족과 약속이 있다고 하면 그것도 믿지 못해 미행을 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내 이별 통보 앞에서 서럽게 우는 것도 모자라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그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자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럴 때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은 자신이 어리고 무능력해서 이러냐며 나를 몰아세울 때였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대학 입시에 떨어졌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나에 대한 집착으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별 선고는 오히려 그의 집착을 더욱 자극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리는 것’이란 집착의 사전적인 의미는 한편으론 참 낭만적이다. 그리고 사랑은 확실히 집착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건 그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를 향한 사랑에 빠져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교묘한 집착이 나를 뒤흔들어 바꿔놓았을 때 오는 삐뚤어진 성취감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전쟁을 종식시킨 건 국가의 부름이었다. 대한민국은 아직 휴전 국가임을 알리며 남자가 군복을 입자 우리도 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몇 달 뒤면 남자는 훈련소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비행기는 이미 벚꽃을 보러 가는 승객들로 만석이었고,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방법은 부산에서 출발하는 페리. 20시간은 지난 2년에 비하면 긴 시간이 아니라며 표를 끊었던 것이다. 


앞으로 남은 10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가 문득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난 누군가와 함께 트럭을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흔들리는 배 안이라 그런 꿈을 꾼 걸까? 일어나 보니 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묵묵히 입국을 준비하는 승객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만개한 벚꽃나무들이 마중 나와 있는 걸 보니 안심이 됐다. 낯선 글자가 가득한 버스 창밖을 보고 있으니 문득 나는 다시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젯밤 꿈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교코였는지도 모르겠다. - 글 김얀(칼럼니스트) 



CREDIT
    Editor 김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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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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