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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9 Thu

인문학의 눈으로 2014년을 바라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삶은 점점 팍팍해져만 가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데 있어 관용과 수용, 그리고 대담한 자기 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해독하는 데 근본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며, 지난 한 해 일었던 인문학 붐은 인문학이 이 거친 시기의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신년을 맞이하며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위기를 헤쳐나가고 자신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인문학자들의 진심 어린 충고를 들어보았다. 2014년, 인문학의 눈을 통해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할 시기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아이들이 천진한 얼굴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고약한 동요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왜 그리 동요에까지 까칠하게 구느냐고 타박한다. 하지만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이 노래는 참 고약하다. 보다시피 아빠만 출근한다! 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동요 가운데 하나인데, 성 역할을 고정시켰다는 점에서 이 노래야말로 가사를 바꾸지 않는 한 ‘금지곡’이어야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텍스트가 강요된 교육과 문화의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힘센 사람이 명령하면 그대로 따르는 데에 익숙하다. 텍스트는 물론 안정성과 역사성이라는 너른 바탕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과 정보의 바탕이지 그것 자체가 최종적인 결론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교육은 텍스트 추종 능력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른 상급을 분배한다. 이런 조건에서는 체제 순응적인 사람들만 양산할 뿐이다.
 

최근 인문학이 두각을 나타내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 핵심은 인문학이 던지는 묵직한 울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어떤 울림인가? 정작 그 문제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 그러니 인문학조차도 새로운 텍스트이거나 적당한 교양적 지식의 방편에 그칠 뿐이다. 인문학은 지금까지 우리의 학문적 토양이 기능주의적이고 텍스트 추종적이었으며 인간이 소외되었고 인격은 배제되었다는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인문학은 어떤 학문 분야건 인간이 그 주제이고, 주체이며 목적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각성시키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을 통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 본질이어야 한다. 텍스트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질문은 바로 나 자신이 던진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바로 스스로 질문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방식이고 태도여야 한다. 그게 핵심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배제된 지식은 단순히 도구일 뿐이고, 그 지식을 도구로 삼는 개인도 사회도 도구에 불과하다. 텍스트라는 거대한 프레임을 깨뜨리지 않으면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그 틀을 깨지 않으면 늘 고정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좁은 창으로는 좁은 하늘만 보인다. 인문학은 바로 사고(思考)를 치는 혁명의 불길을 요구한다. 틀에 박힌 생각, 타성에 빠진 행동을 털어내고 내가 주인이 되어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발적인 재편 작업이 바로 지금 인문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이게 빠지면 인문학의 열풍은 금세 사위고 말 뿐이다.

“엄마가 출근할 때 뽀뽀뽀~, 아빠가 안아줘도 뽀뽀뽀~”라고 노래 부르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갇힌 틀의 노예로 살아갈 뿐이다. 힘센 사람, 돈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에 끌려 사는 것은 내 삶이 아니다. 진짜 성공적인 삶은 뭔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삶을 원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더 이상 성과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삶을 흉내 내거나 선망하지 말자. 파블로 네루다의 시 구절을 떠올려보자.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안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나였던 그 아이’ 잃지 않고, ‘나인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 정신의 핵심이다. 올해는 제대로 사고 한 번 치고 살자! 껍데기는 가라!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피해의식은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열심히 살아도 늘 제자리, 심지어는 더 하향평준화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피해의식과 불안감에 휩싸인 현대인들을 위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응급처치를 실시한다면?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정직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 하지만 권위적인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숨기게 된다. 감정이 죽은 상태로 좀비처럼 되는 거다. 인문학은 그걸 살려주는 학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폭발시킬 수 있게끔 감정을 살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개인의 감정을 다 표출하며 살라고 한다면, 특히 요즘처럼 힘든 시기에는 부정적인 감정의 폭력적인 발산이 난무하지 않을까? 너무 거칠어질 것 같기도 하다.
부정적인 게 진짜다. 좋을 때 좋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의 소리가 더 많이 표출되는 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속이 다 썩어 있는데 병의 징후가 밖으로 안 나타나면 그게 더 문제지 않겠나? 우리 속이 다 썩어들어가는데 겉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건 곧 억압적 관계 구조를 나타낸다. 누가 꼬집었을 때 아프면 “아야!” 하는 게 당연한 반응인데, 권위자와 권력자, 나보다 더 직급이 높은 사람들은 ‘내가 꼬집었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왜 그래?’라는 식으로 억압을 가한다. 한마디로 ‘내 감정이 부정적이다’라는 판단은 사실상 내가 내리는 게 아니라 나보다 권위 있고 힘 있는 사람이 내리는 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잣대에 자꾸 깎여나가다 보면, 자연스러운 포물선을 그려야 할 감정의 그래프 모양이 기형적이 된다. 기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하지만 부정적인 속마음은 그대로 방치된 상태로 말이다.

그렇다면 강신주가 생각하는 2014년을 맞이하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방치된 상처를 쓰다듬으려면 말이다.
올해 강신주의 화두는 ‘감정을 살리자’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행동강령을 생각해봤다. 영화 보고 많이 울기, 옆 사람들 다 우는데 나만 안 울지 않기.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로 하기. 예술적인 것을 최대한 많이 접하고 음악도 많이 듣고 뮤지컬도 보고 춤도 추러 다니기. 이런 식으로 감정을 키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거창한 예술 활동일 필요는 없다. 현대인들의 필수품, 스마트폰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 감정이 움직이는 장면, 순간을 만났다면 그 감정을 찍어라. 내 소중한 감정을 찍어 담는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며 소리 내어 우는 것도 좋다. 눈물이 많다는 건 좋은 거다. 내 감정에 솔직하게 산다는 거니까.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데로 마구 돌아다녀야 한다. 집에만 있으면, 회사만 왔다 갔다 하면 절대 감정을 일으킬 수도 폭발시킬 수도 없다. 마음이 복잡하고 답답할 때 여행을 가려고 하는 심리와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게 온전히 환경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핑계이자 엄살로 보일까 봐 그러는 것도 있다.
어떤 시도나 행동을 안 해봤다는 이유로 안 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엄살이다. 안 해봤기 때문에 두렵고 무서운 거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나서 하는 이야기라면 달라진다. 그리고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안 해보면 그것이 나를 망치고 나쁘게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무섭지만, 막상 해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해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두가 힘든 이 시기에 ‘나도 힘들다’, ‘짜증 난다’, ‘화가 난다’ 이런 식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하는 방법론의 문제가 남는 것 같다. 이건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조절해야 할 때도 분명 있으니까. 
감정이 표출되는 것을 막아서 컨트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감정을 잘 조절한다는 건, 잘 막는 것이 아니라 ‘통로’를 잘 뚫어놓는 것이다. 이미 흘러 나오기 시작한 감정을 막아버리면 어떤 식으로든 안 좋게 터질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지그재그로 길을 만들어 더딘 속도로 흐르게 할 수도 있다. 일종의 ‘감정의 이이제이’ 전략이다.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적절한 수준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평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잘해둬야 한다. 연애도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하는 법이다. 자신의 감정이 시키는 대로 쓰고 말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소소하게, 일기를 쓸 수도 있고 하루 중 내 감정을 움직이는 것들을 폰카로 찍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단, 반드시 자신의 ‘감정’이 일어날 때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건 가짜가 되고 허세가 될 뿐이다.

너도나도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겉핥기식 인문학의 부작용을 목도하게 되기도 한다.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혹은 쉽게 체념하는 식으로 말이다. 부작용 없이 인문학을 내면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인문학을 ‘화장품’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자신을 고상하게 포장하는 화장품처럼 여기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아는 척하고 고상한 척하기 위한 도구로 인문학을 취한다면 그건 실패한 인문학이고 가짜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게 된다.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자기답게 살도록 깨우쳐주는 것이 인문학의 가장 큰 가치이자 존재 이유다. 인문학은 종교가 아니다. 니체의 책을 읽고 니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니체가 자신의 묘비명을 통해 이런 얘길 했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이라고 말이다. 니체가 한 말 자체, 그의 감정 상태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요즘 세대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386세대로 대변되는 예전 세대는 분명 자율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틀로서 사상과 인문학에 접근했었지만, 요즘 세대는 그런 기회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세대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부친 살해의 욕망’이라는 것을 품고 산다. 여기서의 부친은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일종의 ‘슈퍼에고’를 뜻하는 거다. 이전 세대만 해도 그 슈퍼에고는 국가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독재였다. 당당하게 위에 맞부닥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완전히 ‘관리된 세대’이다.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부모가 다 관리를 해준다. 위를 향해 저항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아마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다 보니 시야가 매우 좁아져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됐다. 어떤 직장을 가느냐의 문제이지, 빨간 줄이 가지 않은 이상 취직이 안 될까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취직 자체가 안 된다. 기본적인 전제가 성립이 안 되니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불안해서 남들이 하는 건 다 따라 하는 분위기다. 스펙 쌓기 열풍이니 인문학 붐이니, 이런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요즘에도 엄연히 ‘빨간 줄의 공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SNS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돼 취업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개인의 정치사회적 성향을 감춰야 사회에 쉽게 편입될 수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다. 옛날에는 감옥에 끌려가는 그 순간에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고 했지만, 요즘은 그냥 간단하다. ‘너 우리 회사 오지 마’. 이게 탄압일까? 탄압이 아닌데, 탄압이다. 사람들을 굉장히 무력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 붐이 일고 있다는 건, 사람들이 점점 더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쉽게 말해, 예전 세대는 체제에 저항이라도 할 수 있었다. 고통과 억압을 주는 ‘나쁜 체제’에 저항하는 것은 곧 좋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억압을 받는 상황에서도 저항 자체를 할 수 없다. 억압이 주는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도 아닌데 해소할 방도가 없으니, 그로 인한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뭘 찾는가? ‘힐링’이다. 이게 기본적으로 현재의 인문학이 처한 상황이라고 본다. 대체적으로 개인의 ‘심리’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는 현상이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우리 개개인의 심리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2014년에는 삶의 질 자체가 개선될 여지가 있을까?
경제는 조금씩 회복기에 들어선 것 같다. 문제는 그게 보통 사람들의 삶에 와닿겠느냐 하는 것인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분배 구조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데, 그게 해결되지 않는 이상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느낌을 강하게 받기는 힘들 것 같다. 정치는? 사실 굉장히 회의적이다. 산업화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진입했던 한국 사회의 토대가, 지난 정권을 거치면서 또다시 산업화 사회로 퇴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토대만이 아니라 정치적 상부 구조 자체가 산업화 사회 더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게 언젯적 담론들인지, 도통 모르겠다.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는 세상이다. 한편으론 따라잡지 않으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현실을 더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지금 세상살이의 힘겨움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우리가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래도 생활이나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사회의 책임인 거다. 요즘 세대들이 안타까운 건 그래서이기도 하다. 스펙 열심히 쌓으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다 쌓았지만, 최고의 스펙을 갖췄는데도 취직이 안 된다. 그건 더 이상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럴 경우에는 ‘게임의 규칙’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다 지는 게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다 루저가 되는 게임인 거다.

루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다 바뀌어야 하는 거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육,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내야 한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변에서부터 조금씩 바꿔나가는 거다. 물론, 그런 변화를 지지하고 추진할 수 있는 권력을 창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권력이 다 해줄 수는 없다. 우리가 행동하고 요구하지 않는 한 말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요구할 줄 알아야 하며, 때론 저항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 그건 저항뿐이다. 거창할 것도 없다. 나의 목소리를 내면 된다.

CREDIT
    Editor 박지현
    Design 최인아

이 콘텐트는 COSMOPOLITAN
2014년 0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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